심씨 성의 유래

1. 심씨 성의 유래

(1) 유래 1
사문유취(事文類聚)라는 고전 성씨부(姓氏部)에 이르기를 周나라 文王(1099?1050BC)의 아들 1)시숙(時叔)이 심 땅에 封함을 받고 그 후 심씨(沈氏)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문왕의 열째아들인 담계재(聃季載)가 재주와 덕이 있어 2)사공(司空)의 벼슬을 주고 그를 하남성(河南省) 여남(汝南) 땅에 봉(封)하였다. 그 땅을 심자국(沈子國)이라고 명함으로서 심씨의 시원(始原)이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시숙(時叔)과 담계재(聃季載)는  同一人으로, 기록에 따라서는 담계(聃季), 또는 시숙담계(時叔聃季)로 되어있다. 심국(沈國)은 채(蔡)나라에 멸망하였다.
【註】①문왕의 아들 17子 中, 숙(叔)字를 쓰는 이름이 8子이나 된다.
②사공(司空) : 땅을 관리하는 벼슬.

(2) 유래 2
春秋 昭公 元年 下半部
昔金天氏有裔子曰昧, 爲玄冥師, 生允格, 臺?. 臺?能業其官, 宣汾 ?, 障大澤, 以處大原. 帝用嘉之, 封諸汾川, 沈, ?, ?, 黃實守其祀.

상고에 금천씨(金天氏)에게 막내아들(裔子)을 두었는데 이름이 매(昧)였다. 그는 물을 주관하는 사람(玄暝師)이 되었고 윤격(允格), 대태(臺?) 두 아들을 낳았다. 대태가 그 아비(昧)의 관직을 잘 계승하여 분수(汾水)와 조수(?水)의 물이 잘 흘러가게 하였고, 큰 못의 제방을 쌓아 잘 막고는 대원 땅에 거처하였다. 임금(전욱씨 ?頊氏라고 여겨짐)께서 그를 가상히 여겨 분천 지역에 봉했다.(그 후손의 나라인 분천지역) 심국, 사국, 욕국, 황국은 대태의 제사를 잘 받들었다.
【註】① 沈은 나라 이름이며 물 이름인데 楚나라 상채 汝南府에 있고 지금의 汶水가 바로 그 물줄기이다.
② 사료에 근거하면 유래1, 2가 있다. 만승공(滿升公)에 대한 행장기록을 살펴보면, 보첩 창간 己丑譜(1779      

2. 한반도에 처음 등장하는 심씨 인물(沈氏人物)

사기(史記) 「진흥왕조(眞興王朝)」에 진흥왕 10년(549) 봄 중국 남조(南朝 : 宋·齊·梁·陳·吳·東陳 : 6朝 / 420?589)인 양(梁)나라가 신라 구법승 각덕(覺德) 스님이 귀국하는 길에 사신 심호(沈瑚)를 파견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이름은 확인할 수 없지만 심청전의 원형 「관음사 사적기(심청의 원명은 원홍장元洪莊)」, 중국 정사(正史)인 진서(晋書 : 심청을 원희元姬로 표현), 중국 주산해국(舟散海國 : 일명 회계국會稽國)의 영파시지(寧波市誌) 등의 기록에, 역사적 실존인물 성녀(聖女) 심청(원홍장을 원희로 개명)은 286년 백제 고이왕 때 전남곡성 출신 원홍장을 회계국(현 중국 주산군도 보타도普陀島 일원) 국제상인 심국공(沈國公)이 진나라 혜제(惠帝) 성비(聖妃)로 추천하기 위해 모셔간다. 그 후 원홍장은 심국공(沈國公)의 양부(養父)의 성을 따라 심청(沈靑)으로 개명(改名)한다.


심청(원희元姬)은 이어 심국공(沈國公)에 의해 진(晉 265?316)나라 혜제(惠帝) 문명왕(文明王)의 후비인 황후가 되었는데, 심국공(沈國公)은 동이족(東夷族)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가 세운 동해담인(東海?人)이라 하였다.(25史 晋史列傳). 이는 요서지역에 있던 담국(?國 : 백제분국)과 같다.


지리적 환경이나 중국 남조와 신라·백제·고구려의 잦은 왕래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심호(沈瑚)보다 훨씬 앞선 시대 심씨가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계해보 상권 76쪽 심씨원류(沈氏源流)의 사적고찰(史的考察)에서 심씨가 문헌상으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신라 말 경순왕(9912?935)때, 중국으로부터 팔학사의 동래설(東來說) 중에 「심씨 성이 있을 뿐, 그 후의 심학사의 행적은 알 수 없고,」 라는 내용이 있다.


팔학사 동래설(東來說)에 근거하는 각 성씨의 연대를 고찰하면 동래한 시기가 모두 다르고 중국 대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데에서 파생된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동래설(東來說)이다.


각 성씨 팔학사 동래설

忠州池氏의 시조 지경(903?1003)   
長興魏氏의 시조 위경(연대미상)
玄風郭氏의 시조 곽경(1117?1179)    

原州元氏의 시조 원경(연대미상)
靈山辛氏의 시조 신경(연대미상)    

咸平牟氏의 시조 모경(연대미상)
南陽洪氏의 시조 홍경(연대미상)    


모든 盧氏 시조 노수(본래 이름 노경) 조선시대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 토박이 성 외에 중국대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았고 중국의 고대역사적인 인물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성씨(姓氏)의 시조선계(始祖先系)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하나 유래 1, 2에 나타나는 지명은 물론 중국 동북삼성(東北三城), 하남성(河南城), 절강성(折江城) 등은 본래 동이족(東夷族)이 점유했던 생활 터전이었다.

癸亥譜 자손록 시조 만승공(始祖 滿升公) 行狀에서 "중국 오흥(中國 吳興)에서 호종단(胡宗旦) 유재(劉載) 안신지(安?之) 등 함께 동쪽으로 왔다"는 說은 初刊 己亥譜와 丙辰譜에는 없던 내용이 3번째 발간된 乙丑譜에서 "東來"했다는 내용이 추가 수록되었다. 국제적, 시대적 환경으로 미루어 보면 蓋然性은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확인할 수 없고, 癸亥譜에서 추가된 "호종단(胡宗旦) 유재(劉載) 안신지(安?之) 등 함께"의 내용은 연대는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검증은 不可한 내용이다.


팔학사 중 심씨는 확인할 수 없다.


조선시대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 토박이 성 외에 중국대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았고 중국의 고대역사적인 인물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성씨(姓氏)의 시조선계(始祖先系)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하나 유래 1, 2에 나타나는 지명은 물론 중국 동북삼성(東北三城), 하남성(河南城), 절강성(折江城) 등은 본래 동이족(東夷族)이 점유했던 생활 터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