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심씨 대종회 약사

우리 풍산심씨(豊山沈氏)는 서기 1100년경 고려 예종조(睿宗朝)에 상서(尙書)와 봉어(奉御)를 지내시고 태자첨사부첨사(太子詹事府詹事)를 역임하신 만승공(滿升公)을 시조(始祖)로 하고 왕조(王朝)가 바뀌는 과정에서 낙남(落南)하신 8세조 승경(承慶 資憲大夫 三司右使知議政府事)공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조선조(朝鮮朝)를 도우신 계자(季子) 구령(龜齡 諡 靖襄 靖國功臣)公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30여 代를 걸쳐 역사의 소용돌이에서도 명재거경(名宰巨卿 : 훌륭한 재상과 큰 벼슬)과 절신(節臣)을 배출하고 나라가 위란(危亂)에 처할 때는 목숨을 바쳐 충성(忠誠)을 다한 가문(家門)의 후예(後裔)로 더없는 긍지(矜持)를 갖게 한다.

위선봉사(爲先奉祀)와 종친(宗親)들의 돈목(敦睦)을 위해 팔당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남한강을 양평에서 도선(渡船 : 배로 건넘)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종친(宗親)을 만난다는 설레 임을 안고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운집(雲集)하여 화합(和合)과 발전(發展)을 논의하였다. 매년 시향제례(時享祭禮)를 모시던 중, 1970년 11월 12일 양근(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검천리)의 정양공(靖襄公) 묘역에서 희창(熙昌), 흥기(興基)공의 발의(發議)로 종친회(宗親會) 구성에 대한 논의(論議)를 시작하였다. 뜻을 함께 하는 종친들이 모여 종친회 창립 추진위원회(宗親會 創立 推進委員會)를 구성하고 많은 논의(論議)를 거쳐 득성(得姓) 후 900여년 만인 1971년 5월 풍산심씨대종회(豊山沈氏大宗會)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에 선조(先祖)들의 뜻을 받들고자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신 사실(事實)을 알았고, 앞으로의 발전방향(發展方向)에 대한 지표(指標)를 찾고자 서류, 회보 및 자료 등을 정리하면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십시일반(十匙一飯) 기금을 모아 사우(祠宇)를 수리하고 지키신 일과 종친들의 모임자리를 마련하신 일에 숙연함을 느낀다.

또 전국 궁벽(窮僻)한 산천계곡을 누비며 한 사람이라도 족보 등재(癸亥譜)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하신 노고(勞苦)와 육영사업(育英事業)으로 장학기금(‌獎學基金)을 조성하신 일, 시조와 선조님들의 설단(設壇) 즉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하고 추원사(追遠祠)를 건립하신 일 등은 우리 후손(後孫)들이 더욱 본받아 계승(繼承)할 일이다.
샘이 깊으면 쉬이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쉽게 넘어가지 않듯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생활해 오신 선조님들의 숭고(崇高)한 뜻을 헤아리면서 종친회 창립 후의 과정과 행적(行蹟) 등을 몇 개의 분야로 정리하여 게재(揭載)한다.

西紀 2012년(壬辰) 10월
‌28世孫(靑鶴公派) 鉉鍾 書